제1부 · 시선의 전환 · 제2장 · 불안의 사다리를 내려놓을 때 보이는 길 · 약 6분 독서
변호사시험이 없는 나라의 비밀
말콤 글래드웰의 시선으로 해부한 ‘시험 탈락형 사회’ vs ‘과정 양성형 사회’
“변호사님, 정말 호주에는 변호사시험이 없나요? 그럼 아무나 다 변호사가 되나요?”
강연장이나 상담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면 열에 아홉 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으세요. 우리는 한국이나 미국의 법조 드라마에 워낙 익숙하잖아요. 그러니 바 시험(Bar Exam) 합격 발표날의 눈물이 없는 법조계는 선뜻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아웃라이어(Outliers)』에서 무엇이 개인의 성공을 결정짓는지 살피며 보이지 않는 제도의 구조를 가장 거대한 변수로 꼽습니다. 성실함과 지능이 똑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제도 안으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끝내 장수생에 머물기도 하고 곧바로 변호사가 되기도 하니까요.
호주 대법원이 변호사를 탄생시키는 4단계 공식
호주에서 정식 변호사(Australian Legal Practitioner / Solicitor) 자격을 얻는 법적 공식은 절차가 투명해서 앞날도 예측 가능해요.
- 제1관문 — 인가된 법학 학위 취득 (
LLB또는JD):
우선 호주 각 주 변호사 임용 당국(NSW주의 LPAB, 빅토리아주의 VLAB, 퀸즐랜드주의 LPAB 등)이 인증한 대학에서 법학 과정을 밟습니다. 이때 헌법, 행정법, 형법, 계약법, 불법행위법, 재산법, 형평법 및 신탁법, 회사법, 민사소송법, 증거법, 법조윤리까지 프리스틀리 11(Priestley 11)이라 부르는 11개 필수 법학 과목을 빠짐없이 포함해 학위를 마칩니다.
- 제2관문 — 변호사 실무연수 (
PLT, Practical Legal Training):
법학 학위를 마친 뒤에는 College of Law, Leo Cussen, QUT/UTS PLT 같은 인가 기관에서 약 15~24주간 실무 과정을 밟습니다. 이곳에서 실제 소장 작성과 부동산 등기 이전, 의뢰인 면담, 신탁계좌(Trust Account) 관리, 법정 변론을 시뮬레이션으로 훈련받아요. 여기에 필수 실무수습(Work Experience) 일수까지 모두 채우면 GDLP(Graduate Diploma of Legal Practice)를 받습니다. (참고: 2026년 3월 1일부터 NSW주에서는 대면 워크숍 15일 출석과 PLT 개시 후 최소 15일 실무경험 이수 규칙이 강화되어 실무 밀도가 더욱 높아졌어요.)
- 제3관문 — 주 대법원 임용 심사 및 선서 (
Supreme Court Admission):
이어서 학위 성적표와 PLT 수료증, 영어 요건과 함께 적격성·정직성 진술(Fit and Proper Person — 범죄경력·학업부정·재정 파산 여부 등 철저한 윤리 검증)을 내고 임용 심사를 거칩니다. 심사를 통과한 뒤 주 대법원 법정에서 대법관들 앞에 서서 엄숙히 선서하면 변호사 명부(Roll of Lawyers)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 제4관문 — 2년간의 감독 조건부 실무 (
Supervised Legal Practice, SLP):
임용 직후 개업면허증(Practising Certificate)을 발급받으면 처음 24개월(풀타임 기준) 동안은 선임 변호사의 지도·감독 아래서만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요. 이렇게 2년간 도제식 수련을 마쳐야 비로소 단독 개업이 가능한 무제한 면허(Unrestricted Practising Certificate)로 승격됩니다.
‘입구는 합리적으로, 과정은 치열하게, 윤리는 서릿발 같게’
눈치채셨나요? 호주에는 단 하루 컨디션에 좌우되는 객관식·암기식 국가시험이 없습니다. 그 대신 로스쿨 재학 기간 내내 매 학기 판례를 읽으면서 에세이와 오픈북 사례형 시험(IRAC Problem Question)을 통과하도록 과정을 짜 두었어요.
저 역시 본드 대학교 JD 시절에는 법전과 판례 요약 노트를 수레에 싣고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오픈북 시험이 처음엔 쉬울 줄 알았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었어요! 조문을 외웠는지는 1점도 주지 않았습니다. 처음 보는 분쟁 시나리오가 복잡하게 주어지면 거기에 어떤 판례의 법리(Ratio Decidendi)를 적용하고 구별(Distinguishing)할지 3시간 동안 쉼 없이 논증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이 구조에는 결정적인 희망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떨어뜨리려는 상대평가 커트라인 30%가 아니라 꾸준히 배우면 통과시켜 주는 시스템이거든요. 어제의 나보다 더 정확하게 읽고 논리적으로 쓰는 법을 익히면 반드시 통과합니다. 매일 저녁 세 시간씩 엉덩이를 붙이고 판례를 읽다 보면 벼락치기 천재보다 성실한 학생과 직장인 출신 성인 학습자가 결국 승리합니다.
호주 변호사 면허 하나로 열리는 4개국 커먼로 패스포트
여기에 더해 호주는 영국 관습법(Common Law) 전통을 공유하는 핵심 국가예요. 호주 주 대법원에서 변호사로 임용되는 순간 활동할 세상이 훌쩍 넓어집니다.
가장 가까운 뉴질랜드부터 살펴볼까요. 태즈만해 양안 상호인정법(TTMRA 1997) 덕분에 추가 시험을 단 한 과목도 치르지 않고 서류 심사만으로 뉴질랜드 고등법원 변호사(Barrister and Solicitor of the High Court of New Zealand)로 등록할 수 있어요. 저 역시 2021년 이 제도를 통해 뉴질랜드 변호사 자격을 함께 보유하고 있습니다.
SRA가 인정하는 자격 변호사(qualified lawyer)는 자격 취득 직후에도 별도 실무수습(QWE)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SQE2 실기시험 면제는 별도 절차예요. 자격을 취득한 관할과 실무 경험·역량에 대한 증빙을 SRA가 심사하며, 2년 일해도 자동 면제되지 않습니다. 면제를 받으면 영어 또는 웨일스어 능력 입증도 확인하세요. SRA 자격 변호사 안내
미국 주요 주 변호사(CA · NY · AL)로 나아가는 길도 열려 있습니다. 호주 변호사 자격을 보유하고 있으면 학위 기간(2년·3년)을 따지지 않고 캘리포니아 바(CA Bar)에 즉시 응시 자격을 얻어요. 3년 표준 온캠퍼스 LLB/JD 졸업자에게는 뉴욕 바(NY Bar, 22 NYCRR § 520.6)도 직접 응시 문을 열어두고 있고요(2년 속성 JD는 미국 1년 LL.M. 보완 가능). 미국 앨라배마 주(Alabama Bar) 등 커먼로 학위와 UBE 점수 이전을 인정하는 주를 거치면 한·호·미 크로스보더 전문 변호사로 도약할 수도 있어요.
호주 변호사 자격 하나를 얻었을 뿐인데 태평양과 대서양의 커먼로 법조계로 실무 진로가 나란히 이어지는 셈입니다.
공식 출처 2026-11-01 · www.sra.org.uk ↗